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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할 때 아드레날린 솟구쳐"…'고기깡패'는 DNA였다[인터뷰①]
등록 2024.10.25 06:30:00 수정 2024.10.26 09:46:14
흑백요리사 '고기깡패' 데이비드 리 인터뷰
어릴적 꿈은 농구선수, 대학은 미대로 진학
취사병 보직 변견 하면서 요리 즐거움 느껴
부모님은 고깃집 운영…전역 후 美 뉴욕행
FCI 졸업하고 미쉐린 레스토랑서 경력 쌓아
한국서 자신의 요리 철학 구현한 '군몽' 운영
[서울=뉴시스] 이창환 기자 = 지난 8일 막을 내린 넷플릭스의 요리 서바이벌 프로그램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흑백요리사)은 하나의 신드롬이라고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파급효과가 엄청났다.
참가자들은 스타셰프로 거듭났고, 이들이 운영하는 식당은 예약이 어려울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몰렸다. 꽁꽁 얼어붙었던 외식업계에는 모처럼 활기가 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요리와 음식 문화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아진 모습이다.
흑백요리사의 가장 큰 흥행 요인은 다양한 개성과 서사를 가지고 있는 출연진이었다. 한식, 양식, 중식, 일식 등 다양한 분야에서 파인다이닝 레스토랑 셰프부터 작은 동네 식장 사장님까지 천차만별의 요리 이력을 가진 사람들을 한 곳에 모았다.
이 때문에 우승자 나폴리 맛피아와 준우승자 에드워드 리(이균) 뿐만 아니라 여러 출연진의 도전 과정과 요리 인생이 온라인 상에서 화제가 되며 여운이 이어지는 모습이다.
'고기깡패' 데이비드 리(43)는 흑백요리사를 통해 스타 셰프로 부상해 눈코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출연자 중 한 명이다.
80인의 흑수저 요리사 중 한 사람으로 도전에 나선 그는 프랑스 음식인 비프 부르기뇽과 우리나라의 갈비찜을 접목한 '가르비뇽'이란 메뉴로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1라운드를 통과했다. 2라운드 '흑백대전'에선 평소 동경의 대상이었던 에드워드 리에게 과감하게 도전장을 던졌다.
'상대가 너무 셌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아쉽게 패배했지만 그의 묵은지 요리도 '삼키기 싫다. 정말 깡패 같다.'는 호평을 받았다. 에드워드와 데이비드의 승부는 명장면 중 하나로 남았다. 그리고 비교적 일찍 탈락했지만 '깡패'처럼 강렬한 색채를 지닌 데이비드 리의 요리는 많은 사람에게 궁금증을 남겼다.
요리사가 되기까지의 과정은 흥미로웠다. 부모님은 꽤 유명한 한우 고깃집을 운영했다. 집안 환경은 비교적 넉넉한 편이어서 진로에 대한 심각한 고민은 없었다. 어릴 땐 농구선수의 꿈을 품었으나 '키가 작다'는 현실적인 이유로 포기하고 자신이 두 번째로 소질이 있다고 자부한 그림으로 미대에 진학했다.
요리는 운명처럼 다가왔다. 군복무 중 취사반장의 회유로 취사병으로 보직을 변경하면서 인생에서 처음으로 요리를 접하게 됐다. 당시 '기존에 좋아했던 것들을 다 이길 정도로 너무 좋아했다' '피곤하지 않고 다음 날이 기대됐다'는 감정을 느끼게 됐다고.
군 전역 이후인 지난 2005년께 요리 공부를 하기 위해 미국 뉴욕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평소 자식의 꿈을 응원해주시던 부모님의 가치관과 "요리하는 사람이 보다 존중받는 사회에서 자랑스럽게 네 일을 하라"는 조언 등도 데이비드 리의 결심에 불을 붙인 요인들 중 하나였다고 한다.
미국의 유명 요리학교인 FCI(French Culinary Institute)에서 요리를 공부한 그는 졸업 후 다양한 식당에서 실전 경험을 쌓았다. 이름이 알려진 한 씨푸드 레스토랑에 몸담고 헤드 셰프 자리까지 오르기도 했지만 자신을 더 성장시키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일선 미쉐린 스타 레스토랑의 '라인 쿡'으로 자리를 옮기기도 했다. 그렇게 미쉐린 2스타, 3스타 주방을 비롯해 뉴욕에서 15~16년간 셰프로 경력을 쌓았다.
2019년 한국의 한 육가공 업체에서 이직 제의를 받고 한국으로 돌아온 데이비드 리. 그는 현재 '시공간과 내가 음식에 표현돼야 한다'는 요리 철학과 '편안면서도 제대로 양식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었으면 좋겠다'는 일념 아래 자신의 레스토랑을 2년째 운영 중이다.
튜브가이드는 지난 18일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군몽'에서 데이비드 리를 만나 그의 인생과 요리 철학에 대해 들어봤다.
"미대 진학했지만 취사병 하며 '요리 좋아하는구나' 인식"
-미대에 입학했는데 요리를 배우기 위해 미국 뉴욕으로 유학을 가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일련의 과정이 궁금합니다.
"제가 편도선 수술을 받고 부대에 복귀했더니 제 자리가 다 차 있었어요. 그때 (취사병) 병장이 전역할 때가 된 거죠. (위에서) '얘를 어디에 배치하지' 이렇게 찾는 과정에서 제 인적 사항에 부모님이 식당 운영을 하신다는 내용이 있어서 '취사반이네' (하신 것 같아요). 갑자기 취사반장이 데려가서 신라면, 짜파게티 등 라면을 끓여주고 냉동식품을 주면서 회유했습니다. 근데 (막상) 했더니 이제 너무 재밌는 거죠. 처음 알았어요 '내가 이걸 좋아하는구나' '기존에 좋아했던 것들을 다 이길 정도로 너무 좋다'. 피곤하지도 않고 다음 날이 기대됐습니다."
"취사병 생활이 너무 좋아서 (당시 다니던) 미대를 접고 요리를 배워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어디로 갈까 생각을 좀 했었는데, 그나마 영어가 낫겠다 싶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제가 나고 자란 곳이 용산이었고 영어는 워낙 좋아했습니다. 또 가장 친했던 대학 동기가 맨해튼에 이미 가 있었고요. 미국 중에서도 뉴욕의 이점이 많더라고요. 또 막상 가보니까 외식시장도 너무 잘 돼 있었죠. 식재료 자체가 우리나라에 비했을 때 너무 좋잖아요."
"(또) 저희 아버지가 유학을 권유해주셨어요. 그때 사업이 엄청 번창했을 때인데도 '대한민국에서 직업에 귀천이 있다' '네가 하는 일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말씀하신 게 확 와닿았죠. 좀 더 존중받는 사회에서 자랑스럽게 일했으면 좋겠다는 취지로 해주신 거예요. (그리고) 뉴욕에 가서 일을 하면서 느꼈어요, 요리를 잘하니까 사람들이 좋아해주고 친구들도 멋있다고 하고. 셰프가 사람들이 하고 싶어 하는 직업군 중 하나였으니까 그런 걸 느끼면서 여기서 오래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전역 후에도 요리에 대한 관심, 흥미가 이어지신 거죠.
"그렇죠, 전역 후에는 '빨리 준비해서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 생활도 해야 되고 돈도 어느 정도 벌어야 되니까 아침반으로 요리학원에 다니고, 그거 끝나면 어학원에 가고. (오후에는) 이제 학원에 가서 아이들 (그림을) 가르치는 생활을 반복하다가 준비를 하고 이제 (뉴욕으로) 넘어갔습니다.
"어릴 적 꿈은 농구선수…부모님은 한우 고깃집 운영"
-부모님께서 하시는 사업이 음식점인가요.
"네, 오랫동안. 지금도 하고 계십니다. 한우 고깃집인데 반찬이 거의 20가지 쫙 나오고.이제 부위만 고르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맛있는 걸 많이 먹고 자랐어요."
-어렸을 적 꿈은 무엇이었나요.
"농구선수였어요, 그런데 원초적인 이유로 그만뒀어요. 키가 안 큰데 어떻게 계속 해요. 그래서 남들이 그다음으로 잘한다고 하는 게 뭐지, '그림 잘한다' 하니까 미대 가야지. 고등학교 1학년 때 미술학원에 보내달라고 부모님께 부탁드렸습니다."
-원래 집에서 하고 싶은 걸 응원해주시는 편인가요.
"맞아요. '공부는 그냥 남들 하는 만큼만 해라. 대신 하고 싶은 게 뭐냐'고 하시면서 (관심 분야를) 잘 찾아주셨습니다. 대신 '끈기 있게 해 아니다 싶으면 딱 그만'. 그래서 재능을 좀 많이 키운 것 같아요."
"'헤드 셰프'에서 최저시급으로 미쉐린 2스타에 취업"
-미국으로 유학을 가셔서는 어떻게 요리를 배우셨나요.
"미국에 유명한 요리학교로 CIA, FCI(French Culinary Institute) 등이 있는데 저는 FCI로 갔어요."
-학교를 졸업하신 뒤에는 어떤 레스토랑들을 거치셨어요.
"여러 곳에서 일했어요. (그러다가) 어느 정도 이제 됐다 싶을 때 씨푸드 레스토랑으로 되게 유명한 곳으로 가서 일하고 헤드 셰프까지 올라갔죠. 정확히 얘기하면 총괄 부주방장으로 있다가 헤드 셰프가 나가면서 그 자리를 맡은 기간이 있었습니다. 근데 그때 '여기서 멈추면 이런 셰프로 정지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여기서 멈추려고 미국까지 와서 공부하고 일하는 건 아닌데. 갑자기 무섭더라고요. 그래서 결심하고 제 집사람한테 얘기했죠 '퇴사하겠다' '다시 요리를 배우러 라인 쿡, 라인에서 일하는 직원으로 돌아가겠다'고. (반대했었지만) 대신 배울 만한 곳만 가겠다, 미쉐린 스타가 있는 곳만 가서 나를 리트레이닝 하겠다고 했어요."
"당시 받을 수 있는 최고 연봉, 목표하던 걸 찍었고 다 내려놓고 갔어요. 이메일로도 이력서를 보내고 기다리기가 싫어서 업장에 찾아가서 직접 주기도 했습니다. (회신이 왔던) 미쉐린 1스타인 한 호텔에서 매니지먼트급 면접을 하면 마지막 단계는 테이스팅이에요. (당시 제시받은 시급, 의료, 복지 서비스 등이) 너무 좋았어요. 건강 검진 검사지를 들고 다시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미쉐린 2스타에서 전화가 왔어요. 고민을 진짜 많이 했죠. 호텔에 가서 이 상황을 얘기하니 셰프가 '축하한다' '너 여기 있을 나이 아냐'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저를 보내시더라고요. 되게 멋졌어요. 꿈에 그리던 2스타에 갔더니 3일째 되는 날 고용하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 '뭘 시키든 얼마든 좋다' 했더니 진짜 최저(시급)를 줬습니다. (2스타에서 일하다) 3스타 주방도 갔고요."
-만약 그때로 돌아간다면 같은 선택을 하실 건가요.
"그렇죠, (제 인생의) 전환점이었어요. 왜냐하면 미쉐린 스타는 음식을 배우러 가는 곳은 아니에요. 그런 테크닉은 어떤 레스토랑에 가든 배울 수 있어요. 미쉐린 스타를 왜 꼭 가야 되냐면 셰프로서 주방에서 하는 서비스, 바깥에서 손님한테 하는 서비스, 다루는 재료들, 와인 등 모든 레벨, 수준을 보는 거예요. 경험하지 못하면 모르는 수준을 일을 하면서 습득하는 거죠. 그거를 알아야 나왔을 때 그 정도의 서비스를 구사할 수 있는 거."
"힘들어도 아드레날린이…시공간 그리고 제가 음식에 표현돼야"
-미쉐린에 계셨다가 나오시는 분들의 목표는 본인의 업장을 꾸리는 건가요.
"그거는 다 다르죠. 저 같은 경우 언젠가 제 걸 한다면 '파인다이닝을 하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앞서 파인다이닝에서 일할 당시) 요리할 때 되게 재밌어요 매일매일. 오늘도 해냈다, 죽을 뻔했다, 그걸 매일 느꼈어요. 매일매일 엄청 힘든데 막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거예요."
-2019년 한국에 오신 배경과 그 이후에는 어떻게 지내셨나요.
"갑자기 한국에 있는 한 육가공 회사로부터 '일을 같이 해보자'는 제안이 들어와서 그때 처음 생각하게 된 거예요. 부모님 곁으로 가고 싶기도 했고 저희 가족들한테 한국이라는 아빠 나라에서 한번 살아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겠다고 생각이 들어서 왔죠. 한 4년 정도 힘들게 일을 했어요. 그러면서 이제 한국 시장을 보게 되니까 양식이 극과 극이더라고요. 저가 혹은 파인다이닝은 되게 많은데 그 중간에 양식을 편하고 제대로 먹을 수 있는 데가 없어서 결국 (제 가게를 2년 전쯤) 오픈하게 된 거죠."
-오픈 당시 반응이 궁금합니다.
"주요 상권도 아니고 힘들었죠. 저는 아버지를 보면서 느낀 게 있는데 '맛집은 찾아간다'고. 저는 프리미엄 상권에 투자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어요, 한마디로 그런 조건에 돈을 쓰는 거잖아요. 그 이상만큼 자신감은 있었죠. 음식은 편안한 공간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일부러 이렇게 상가보다는 가택처럼 생긴 곳에 좀 들어가고 싶다고 생각해서 여기를 처음 딱 보고 바로 계약했습니다."
-자신만의 요리 철학이 있다면.
"시공간, 그리고 제가 음식에 표현돼야 된다. 시간이라고 하면 '계절', 공간이라고 하는 거는 '제가 어디서 요리하는지'입니다. 그리고 저라는 뿌리가 표현이 돼야죠."
※2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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